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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민중의 노래, 미래의 소리, 내일은 오리라 !!

쉐로모 2012. 12. 21. 00:15

민중의 노래, 미래의 소리, 내일은 오리라 !!

작성자 : 고양이

 

 

 

 

프롤로그

 

빅토르 위고가 1845년부터 1862년에 걸쳐 완성한 장편 소설.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쳐서 감옥살이를 하던 장발장이, 은촛대로 상징되는, 신부님의 용서와 구원으로 새사람이 되어 선행을 베푼다는 이야기. 어린이 명작 동화로 어린 시절엔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그리고 이 고전이 왜 명작인지 정확히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그러나 오늘 영화를 보면서 모든 것이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장발장 - 용서와 구원의 메신저

 

장발장은 증오와 분노로 19년 노역살이를 한다. 그는 가석방 상태로 여기저기 잠자리와 먹을 것을 청하며 떠돌아다닌다. 그러나 ‘위험한 자’라는 이름표는 그에게 고독과 외면의 굴레를 선사한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또 다른 사회의 감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손을 내민 건 밀리에르 신부님이었다. 그에게 범죄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장발장은 순간적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은접시를 훔쳐 달아난다. 경찰들에게 붙들러 온 장발장을 신부님은 변호하며, 오히려 은촛대까지 내어 준다. 그 용서와 구원을 통해 장발장은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자신도 레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시장이자 사업가로 성공한 그는 실제로 가난한 민중들을 위해 살아간다. 그러던 중, 자베르 경감을 만나게 되고 위기에 봉착한다. 무고한 사람이 장발장으로 오인되어 감옥에 가게 될 처지가 되자, 양심의 가책과 안정된 삶 사이에서 갈등하다, 자신이 죄수 24601이라고 밝힌다. 쫓기는 장발장은 판틴의 어린 딸 코제트와 함께 수도원으로 도주한다. 자신의 과거 죄악으로, 자신이 돌보던 노동자들이 파탄의 삶을 살게 된 것이나, 가엾은 판틴의 죽음도 막아주지 못한 것이나, 그러한 모든 죄책감을 남은 일생 동안 코제트를 사랑으로 돌보는 것으로 상쇄하려 한다. 그러나, 자베르의 집념에 찬 추격은 멈추지 않는다.

수년이 지나 코제트는 숙녀가 되어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인 마리우스는 혁명의 깃발을 올리고 바리케이드를 치며 정부군과 맞서 싸운다. 그 전투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과 죽음으로 산화할 때, 장발장은 코제트를 위해 마리우스를 무사히 구출해 온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 혁명 학생들에게 잡혀 있던 자베르를 풀어주고 용서해 준다. 자신을 평생 쫓아다닌 자베르에게, 그는 은촛대와 같은, 구원을 베푼 것이다. 자베르는 그 과정을 계기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생긴다. 한편 장발장은, 자신의 과거 잘못이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행복한 결혼식을 망칠 것 같아, 그들을 축복하고 자신은 멀리 떠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이 예전에 신부님께 받은 사랑과 구원을, 자신의 일생의 적인 자베르에게, 그리고 죽은 레미제라블 판틴의 딸에게, 평생 동안 베풀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메시지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 자신보다 못한 비참한 자들을 자비로 돌보라는 것. 막달라 마리아 같은 창녀에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정들을 저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돌보고 용서하라는 것. 그러한 예수의 구원의 메시지가 육중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장발장을 통해 구현된다.

 

 

 

자베르 - 원칙과 신념의 메신저

 

자베르는 과연 악인인가. 그렇다면, 장발장은 선인인가.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다면, 이 작품은 현실성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절대악이나 절대선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모든 인간은 양면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 장발장도 욕망과 죄악의 굴레에서, 신부님의 위대한 용서와 자비로, 구원을 베푸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자베르도 역시 자기 나름대로 원칙과 신념을 지키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법질서’이다. 죄인의 죄악의 크기가 크든 작든, 자베르가 고수하고자 했던 원칙은 비판받을 순 없다. 개인적 이해관계가 아닌, 합리적 원칙은 찬양받아 마땅하다. 반칙이나 불법이 개입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성적 논리적 원칙주의는 바로 참다운 ‘보수’인 것이다. 그래서 ‘보수’라는 말은 아름다운 것이며, ‘수구’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 사회도 이러한 건강한 보수주의가 필요하다. 자베르는 어쩌면 그러한 인물성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러한 ‘법질서’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고, 법을 어긴 장발장을 추적한다. 그런데, 그에게도 딜레마가 생긴다. 자신을 원수로 생각할 것 같은 장발장이, 자신의 절대위기 상황에서, 도와준 것이다. 그는 자신의 믿었던 원칙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원칙보다 더 위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해 고민한다.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이성보다 가치 있는, 사랑과 용서라는 인간의 위대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합리적 원칙이냐, 사랑과 용서라는 예외냐. 이 작품이 던지는 화두인 것 같다.

 

 

 

 

판틴 - 레미제라블의 메신저

 

19세기 파리, 대혁명을 통해 시민들은 자유를 쟁취했지만, 새롭게 등장한 왕은 예전 왕과 다를 바 없다. 다수의 민중들은 고통 받고 있으며, 빈익빈 부익부는 강화되기만 한다. 세상 도처에 불쌍한 사람들 천지며, 귀족 부르주아는 그들을 외면한다. 민중에겐, 과연 내일이 있을까. 바리케이드 너머, 낙원이 존재할 것인가. 이렇게 희망 없이 살아가는 다수의 레미제라블을 판틴이 형상화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노동자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이다.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같은 다수 민중들도 그녀에게 냉대와 멸시를 보낸다. 레미제라블은 같은 처지끼리 뭉치긴 커녕, 오히려 이웃을 경계하고 질투한다. 이렇게 우매하고 이기적인 민중들에겐 미래가 없다.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스스로 심화시킬 뿐이다. 풀들이 바람에 짓밟혀도 스스로 각성하지 못하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울면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레미제라블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능동적 주체적으로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부르주아라면, 레미제라블에게 값싼 동정을 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계층적 벽을 허물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어떤 사회라도, 프롤레타리아가 사라지고 중산층이 다수가 되는, 복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19세기 파리가 아닌, 21세기 우리 사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코제트, 마리우스, 에포닌 - 사랑의 메신저

 

이 세 청춘은, 슬프게도, 삼각관계이다.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첫눈에 반한 사이라면, 에포닌은 중간에서 그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마리우스를 짝사랑한다. 에포닌이 어쩌면 가장 불쌍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연적을 오히려 그 남자에게 이어주다니. 그렇게 그 남자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에포닌 식의 사랑이다. 그런데 실상 마리우스는, 에포닌의 사랑은 모른 채, 코제트에게만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자신을 대신해 총을 맞아 축어가는 에포닌을 보고, 마리우스는 그녀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렇게 사랑은 엇갈리고 비극적인가. 코제트와 마리우스는 행복한 결혼을 하지만, 그 사이에서 말 못하고 눈물 흘리며 그들의 사랑을 축복해 주는, 에포닌 같은 사람들이 우리 현실에 굉장히 많지 않을까. 그래서 짝사랑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가.

또한 마리우스는 사랑과 혁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코제트에게 달려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와의 이별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동지들과 혁명의 전선에서 죽어갈 것인가. 물론 마리우스는 후자를 택하지만, 이러한 사랑과 혁명의 딜레마도,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고 식상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고전적 코드가 아닌가.

코제트는, 아버지 장발장이 왜 숨어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수도원에서 외롭게 성장한다.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래서 너무나 벅차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다. 이 사랑을 놓칠 수 없다. 위기에 처한 아버지가 또 영국으로 도망가자고 하지만,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수도 있는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다. 아버지냐, 연인이냐. 이러한 딜레마도 너무나 고전적이어서 지루할 수도 있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는 갈등의 양상이었다.

 

 

 

 

민중의 노래, 미래의 소리, 내일은 오리라 !!

 

1832년 혁명의 노래. 소수의 학생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부군에 맞선다. 그들은 혁명을 꿈꾼다. 그런데 이 혁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수의 민중들, 레미제라블, 그들을 위한 것이었다. 혁명의 주체인 소수의 학생들은, 레미제라블이 아닌, 부르주아 귀족들의 자제였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자신과 상관도 없는 다수의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싸웠나. 바로 불평등과 부조리의 프랑스를 개혁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평등의 나라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소수의 학생들의 혁명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투쟁 속에서 죽어간 ‘밤’은 계속 지속되었고, ‘새벽’은 오지 않았다. 그것은 무모한 희생처럼 보인다. 그 학생들이 죽어간 밤에, 다수의 민중들은 공포와 외면의 창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다수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위한 혁명에, 자신들 스스로는 참여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원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총소리가 무서워 혁명의 길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렇게 민중은 이기적이며, 우매한 존재인가. 그래서 혁명은 고독하고 더디 오는 것이라고 옛 시인은 노래한 것인가.

하지만 작가 빅토르 위고는, 영화의 마지막에 합창하는 민중의 노래는,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지금은 절망적 현실인 것처럼 보이고, 밤의 어두운 터널이 영원할 것 같지만, 새벽은 항상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민중의 노래는, ‘미래의 소리’라고 합창한다. 현재에는 들리지 않지만, 그래서 감상적 낭만주의라고 비판받을 수 있지만, 이 민중의 노래는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는 것처럼, 필연적인 ‘미래의 소리’인 것이다 !! 그래서 마지막에 배우들은, 아니 모든 민중들은 외친다.

민중의 노래, 미래의 소리,

“내일은 오리라 !!”

이 말을 나는 종교처럼, 믿고 살 것이다 !!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

 

 

 

 

에필로그

 

너무나 위대한 원작에, 너무나 아름다운 뮤지컬 넘버들, 거기에 혼신을 다하는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 러셀 크로우의 중후한 바리톤,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청아한 고음, 휴 잭맨의 화려하지 않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소박한 목소리. 그리고 앤 해서웨이의, 단발이나 다이어트 투혼보다 더 처절한, 판틴의 비참한 삶을 한곡으로 승화시킨 I Dreamed A Dream. 또한 엔딩의 가슴 벅찬 민중의 노래 합창... 뮤지컬 영화를 처음으로 사랑하게끔 만든 대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풀이, 밟히면 밟힐수록, 더 강해지듯이

혁명은 아직, 끝이 아닌

희망이라는 것. 오늘은 아니지만,

미래의 소리,

“내일은 오리라 !!”

라는 깨달음을

2012년 12월 20일

역시 밤은 지나고, 새벽이 오는 지금...

 

 

 

 

출처 : 네티즌 리뷰
글쓴이 : 고양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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